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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청렴교육) 역사 속 청렴 인물[청백리를 만나다: 정약용, 이항복]
작성자 정종환 등록일 2020.09.08

역사 속 청렴 인물 (1)


<청백리를 만나다>

세상과 백성의 나아갈 바른 살핀 다산(茶山) 정약용

바르고 검소했던 청백리의 표본 백사(白沙) 이항복





세상과 백성의 나아갈 바른 살핀 다산(茶山) 정약용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조선 후기 최고의 실학자이자 봉건질서를 타파하고자 노력한 개혁가 정약용(1762~1836)은 출중한 학식과 재능으로 조선후기 개혁군주였던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정조를 도와 거중기를 제작하고 수원화성을 세우는 데 기여하는 등 발명가로서 수많은 업적을 남긴 그는 1801년 남인을 제거하려는 반대파 노론 세력에 밀려 신유박해에 연루되면서 18년이라는 긴 유배생활을 거치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정치적 탄압까지도 하늘의 뜻이라 받아들였던 다산은 그 기간 동안 학문탐구에 전념해 500여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하기에 이른다. 단지 이론에 머물러 있는 쓸모없는 학문을 지영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했던 그는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 진정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평생 고민했고 이를 책으로 풀어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백성들을 향한 그의 애민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천연두로 고통을 겪고 있는 백성들에게 새로운 치료법과 예방법을 제시한 <마과회통>비롯해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하고 농민생활을 안정시키고자 했던 <목민심서>, 국정 운영의 전반적인 근본개혁 안을 제시했던 <경세유포>, 억울한 백성이 없도록 바르고 신중하게 판결하라는 요지를 담은 <흠흠신서>등을 통해 그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청렴과 정의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도로고 요구한다. 한 번쯤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볼 일이다.(중략)

바르고 검소했던 청백리의 표본 백사(白沙) 이항복

오성과 한음 일화로 유명한 이항복(1556~1618)은 참찬 벼슬을 지낸 이몽량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나서 이틀이나 젖을 먹지 않았고 사흘 동안 울리 않아 점을 봤는데 근심할 것이 없습니다. 마땅히 크게 귀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라는 축하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오성은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군되어 오성대감으로 불리게 된 별칭으로 그는 명종 11년부터 광해군 10년까지 거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권율의 사위기기도 한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와 왕비, 왕자를 호위하는 일을 담당했다.

1597년 병조판서로 재임하고 사임할 때 까지 5번이나 병조판서를 지냈던 그는 마음 씀씀이가 바르고 밝아 청탁이 들어오지 않았으며, 사람을 발탁할 때 오직 그 재능의 유무만 보았으며 오로지 공론을 따랐다고 한다. 또한 자신의 비난과 칭송에 대해서는 맑은 거울에 곱고 추한 모습이 한 순간 지나가는 것처럼 태연하였다.

1617년 선조의 정비인 인목대비가 덕수궁에 유폐되고, 평민으로 만들자는 폐모론에 극렬하게 맞섰던 그는 결국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어 별세하였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나라를 제대로 섬기지 못하여 이러한 견책을 받았으니 내가 죽거든 조복(朝服)으로 염을 하지 말고, 평소에 입던 옷과 띠를 사용하라는 말로 근검절약의 본을 보여주었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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